Cinema

이 영화를 보면 그곳에 가고싶다..... [말리]........

11월... 2012. 8. 7. 13:02


말리(Marley, 2012 120분)


5416m 쏘롱라를 넘어 묵티나트에 이르면....

마을 입구에 Bob Marley 라는 롯지가 있다.....

Bob Marley라는 이름을 들어본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검색을 해보니....

레게의 아버지 같은 사람이란다....

어디선가 한번은 들어본것 같은.....

" No Women No Cry " 라는 노래 말고는 딱히 감흥이 없었다....


그리고 올해........

대학로CGV 무비꼴라쥬에서 영화  "Marley" 를 보았다.....


왠지 자메이카라는 나라가 궁금해졌다....

쿠바 옆에 조그맣게 붙어있는 섬나라...

인구 280만명 남짓.....

아직도 국왕이 존재하는.... 입헌군주제.....

개신교 61%... 로마카톨릭 4%..

우샤인 볼트의 나라.....


자메이카에 가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낡은 스쿠터 타고 터덜거리며 강렬한 태양 속을 돌아다니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영화에 등장하는 몇가지.......

밥 말리


밥 말리(Robert Nesta "Bob" Marley, OM, 1945년 2월 6일~1981년 5월 11일)는 자메이카의 싱어송라이터이다. 레게 음악의 가장 대표적인 가수이자 작곡가이며 기타리스트이기도 하다.


본명은 로버트 네스타 말리이고, 1945년 2월 6일에 자메이카의 세인트 앤에서 태어났다. 17세에 첫 녹음을 시작하였고, 1963년에 버니 리빙스턴과 피터 토시를 포함한 "웨일러스"라는 그룹을 결성하였다. 그는 이 그룹의 리드 기타리스트였고, 결국 리트 보컬리스트가 되었다. 1968년에 그는 라스타파리안으로 개종하였다. 그의 음악은 그의 신앙이 강하게 나타나있다.

밥 말리의 명성은 1972년에 영국의 레코드사들과 계약을 맺은 후에 전세계로 번져나갔다. 말리는 세계의 정치적 대항의 메시지에 레게 음악을 퍼뜨렸다.

밥 말리의 대표곡으로는 에릭 클랩튼이 불러 널리 알려진〈I Shot the Sheriff〉, 그를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만들어준〈No Woman, No Cry〉등이 있다. 정치적 대항에 관한 곡으로는 〈Exodus〉, 〈Zimbabwe〉, 〈Rebel Music〉등이다. 그의 기념비적 앨범인《Legend》(1984)는 전 세계적으로 12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가장 많이 팔린 레게 음악 음반이기도 하다.

밥 말리는 1981년 4월 자메이카 최고의 훈장인 자메이카 메리트 훈장을 받았고, 그해 5월 11일에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1994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라스타파리안 [Rastafarian]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1세(즉위 전 이름은 라스[왕자] 타파리)를 구세주 혹은 흑인의 옹호자로 숭배한다. 흑인은 환생한 유대인이며 신의 벌을 받아 악마와 열등한 백인의 지배를 받아왔지만 결국에는 지상천국이자 진정한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감으로써 구원을 얻고 백인들 위에 군림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1953년 처음 공식화된 이러한 믿음의 뿌리는 여러 독자적인 예언가들과 특히 20세기초 마커스 가비 가 주창한 '아프리카로 돌아가기'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스타파리안파(派)의 여러 집단들은 유럽 중심의 자메이카 문화와 그리스도 부흥운동을 거부하고 아프리카로의 대탈출을 기다리면서 고유의 주체성을 발전시켰다. 1950년대초 이 결사는 숫적으로 크게 성장했고 그만큼 복잡해졌다. 아프리카에 대한 선망은 여전했지만 진정한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는 덜 강조되었고, 호전적인 흑인정치운동이나 구약성서에 근거를 두면서 아프리카적 형태를 가미한 종교적 신비주의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라스타파리안은 식생활상의 규율(예컨대 채식주의), 더부룩한 머리와 수염, 마리화나 흡연 등의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다


하일레 셀라시에 [Haile Selassie]


본명은 Tafari Makonnen. 1892. 7. 23 에티오피아 하레르 근처~ 1975. 8. 27 아디스아바바.

에티오피아의 황제(1930~74 재위).

에티오피아의 근대화를 추진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에티오피아를 아프리카 정치의 본류로 끌어들였다. 에티오피아를 국제연맹과 국제연합(UN)에 가입시켰고 아디스아바바를 아프리카 통일기구(Organization of African Unity/OAU)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암하라 귀족 출신의 증조할아버지는 셰와(쇼아)의 살레 셀라시에였고 아버지는 황제 메넬리크 2세의 최고 자문관을 지낸 라스 마콘넨이었다. 고향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교육받으면서 어린 나이에 황제로부터 지적 능력을 인정받았고 황제는 그를 계속 승진시켰다. 시다모 주와 하레르 주의 지사로 일하면서 월급을 받는 공무원제도를 개발하는 등 중앙정부의 권력을 강화함으로써 지방귀족의 권한 약화를 추구하는 진보정책을 추진해 에티오피아의 진보적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인정받았다. 1911년 메넬리크 2세의 증손녀 와이자로 메넨과 결혼했다. 1913년 메넬리크 2세가 죽고 그의 손자 리(암하라 귀족의 자녀에게 부여한 칭호) 야수가 왕위에 올랐으나리 야수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인데다 이슬람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에티오피아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리스도교도의 인기를 잃었다. 그는 그리스도교도 저항세력의 구심점이 되었고 1916년 리 야수를 퇴위시켰다. 메넬리크 2세의 딸 자우디투가 1917년 황제가 되자 그는 라스(公) 타파리로서 섭정에 지명되었고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자우디투가 보수적인 반면 진보적이었던 라스 타파리는 근대화를 추구하는 젊은 세대들이 희망을 걸 수 있는 핵심 인물이 되었다. 1923년 그는 에티오피아가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데 두드러진 역할을 했고 이듬해에는 에티오피아 통치자 가운데 해외에 나간 최초의 사람으로서 로마·파리·런던 등지를 방문했다. 1928년 '네구스'(왕)라는 칭호를 받았고 2년 뒤 자우디투가 죽자 황제가 되어(1930. 11. 2) '하일레 셀라시에'(삼위일체의 힘)라는 이름을 얻었다. 1931년 의회의 권한을 엄격히 제한한 새 헌법을 공포했으나 이 헌법은 1930년대 중반에 없어졌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그는 사실상 에티오피아를 통치했는데 각 지방에 학교를 설립하고 경찰력을 강화하며, 지방정부의 과세권을 금지하면서 국민을 돕고 중앙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1935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자 하일레 셀라시에는 이에 저항했지만 1936년 5월 어쩔 수 없이 망명해야 했다. 그는 1936년 6월 30일 제네바에서 행한 기억할 만한 연설을 통해 국제연맹에 도움을 요청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의 도움을 얻어내 수단에서 에티오피아 망명군을 조직하고 영국군과 함께 1941년 1월 에티오피아를 침략해 몇 개월 뒤 아디스아바바를 되찾았다. 그는 황제로 복위했지만 이전에 행사하던 권력을 회복해야 했기 때문에 다시 한번 에티오피아 정부와 사회를 근대화하기 위한 사회·경제·교육 개혁을 점진적으로 실시했다. 그는 계속 에티오피아 통치자로서 개인적인 권위에 의존한 권력을 행사했으며, 1955년에는 전보다 더 많은 권력을 그에게 부여하는 새 헌법을 승인했다. 그의 통치에 대해 공공연한 반대가 일어난 것은 군 내부의 반대세력들이 아디스아바바에 대한 통치권을 장악했으나 왕당파가 반격을 가함으로써 다시 쫓겨난 1960년 12월의 일이었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OAU를 창설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에티오피아 통치는 1974년까지 계속되었으나 기근, 실업의 증가, 정부의 무능력은 군대내에서 반란세력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군부 반란세력은 하일레 셀라시에를 퇴위시키고 임시군사정부를 세웠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여생을 궁전에 갇혀 지내다가 83세에 죽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자연사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의학적·법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으며 몇몇 정치평론가들은 살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dreadlocks

머리카락 여러 가닥으로 가늘게 묶어서 곱슬곱슬하게  헤어스타일: 원래Rastafarian 특유한 스타일.